렌조미키히코 '백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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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주의)

<인상깊은 구절들>

 

일흔 살 넘어 최근 몇 년 동안, 잠은 강물처럼 탁해졌다. 잠의 깊이가 강처럼 변한 것이다. 얕은 잠은 탁한 계곡물이나 겨우 헤적거리는것 같고, 깊은 잠은 어두운 강 밑바닥으로 잠겨 들면서도 완전히 가라앉지 못한 채 깊고 무거운 진흙 같은 물속에 반쯤은 묻히고 반쯤은 떠 있었다. 바닥까지 가라앉으면 그건 곧 죽음이고 두 번 다시 이 깊디깊은 잠에서 떠오를 수 없으리라, 눈을 뜨면 매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눈을 떴는데도 의식이 아직 흙탕물 속이어서 이게 바로 죽음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도있었다. 일흔이 되고 처음 한동안은 죽음이 주춤주춤 다가와 해가 갈수록 성가신 물건처럼 자꾸 들러붙는다 했더니만 최근 일이 년 사이에는 또 다른 나 자신이나 친한 친구처럼 내 몸속에 들어앉아 아예 일상이 되어버렸다.

 

 

기차가 선로 저 너머에서 탁류가 밀려들듯 순식간에 달려와서 나는 부스스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를 찾으려는 듯 주위를 둘러보다가 플랫폼의 시계에서 눈길이 멈췄습니다. 죽기위해서는 아직 살아 있어야 하는데 모든 감각을 상실한채 그곳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 자신은 이미 죽었다는 착각에 빠진 것입니다.

 

 

"나오코는 죽어서 다시 내 몸속에 들어왔어. 어떤 책에서 읽었는데 죽는다는 건 태어나지 않은 거래. 그 아이는 앞으로 내 핏속에서 계속 살아가고 나는 점점 더 그 애를 닮아 갈 거야"

 

 

정말 아직도 살아 있는 것만 같다. 살아 있을 때 나오코의 얼굴이나 몸은 이상하게 써늘해서 한여름에도 땀을 거의 흘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속옷은 눈에 보이지 않는 땀을 빨아들여 어느새 눅눅해졌다. 그렇다. 정말로 아직 살아 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건 살아 있을 때는 오히려 죽은 것처럼 느껴졌다는 뜻이 아닐까. 실제로 나오코는 이런 결말을 맞이할 운명인 것처럼 항상 존재감이 희박하고 어딘지 불행해 보이는 구석이 있는 아이였다.

 

 

아버지는 출정 직전에 아내의 배신을 알고 지금의 다케히코 같은 처지에 내몰려 그 뒤의 인생이 크게 뒤틀린 사람이다. 그 반대로 나는 다케히코를 배신하는 위치에 서 있었다. 다케히코가 아버지의 아들로 훨씬 더 잘 어울렸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바로 그건 아니라고 내 생각을 정정했다. 아버지의 피는 분명하게 내 몸안에 흘러들어 예전에 겪은 아내의 배신에 복수하게 해준 것이다. 아버지의 고통을 보다못한 신이나 운명의 힘이 그 피에 복수를 허락한 것이다. 내 멋대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때만큼은 아버지와 나 사이를 이어주는 핏줄을 절절하게 느꼈다. 아버지의 망상의 세계가 옳았고 잘못된 것은 우리 쪽이다. 이 집은 배신과 보복의 전쟁터였다. 승패가 결정되지 않은 채 영원한 싸움을 반복하는 전쟁터.

 

 

그 다음주 목요일에 유키코가 나오코를 데려왔을 때도 나는 은밀히 시아버지의 귀에 대고 말했다.

"저 아이 때문에 정말 짜증 나요."

그렇게 일주일 동안 거의 매일같이, 둘만 있을 때를 노려 똑같은 말을 시아버지의 부서져가는 조개껍데기 같은 귀에 속닥거렸다.

"저 아이 때문에 짜증 나요. 다음에 왔을 때 어떻게 좀 해요."

그런 말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사실은 "아버님 때문에 짜증 나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강하게 "저 아이 엄마 떄문에 진짜 짜증 나요"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저 좋을 대로 나좋을대로 살아가는 유키코를 나는 더 이상 참아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그래도 역시 그 아이를 죽인 건 아버님이고, 죽이라고 한건 나, 가장 중요한 범인은 나였다. 류스케를 범인으로 의심했고 조금 전에는 "당신이 죽였다"고 류스케를 비난했지만, 나는 단지 류스케가 범인이었으면, 하고 바랐을 뿐이다. 류스케가 죽였다면 내 살의와는 아무 관계없이 이 사건이 일어난 셈이니까. 하지만 아무리 속이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그날 나는 희미한 가능성에 걸고 도박을 했을 뿐이지만, 게다가 그것조차 망설이고 또 망설이며 집을 나서기 바로 직전까지 관두려고 했었지만, 실제로 사건이 일어나고 보니 나는 직접 손을 댄 아버님보다 내가 더 비열하고 잔인한 살인범이라는 꺼림직함을 갖게 되었다. 그 꺼림직한 마음에서 도망치기 위해 류스케가 범인일 가능성에 덥석 뛰어들었을 뿐이다.

 

 

증오가 쏟아졌다. 내 손은 그 증오에 떠밀려 소녀의 목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이런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는 나는 정말로 미친 것이라고 생각했다. 연기가 아니라 어느새 정말로 미쳐버린 것이라고,

"괜찮아"

다시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키요의 목소리가 아니라 눈앞의 소녀가 그렇게 중얼거린 것이다. 한 여자가 있었다. 내 눈앞에 네 살짜리 한 여자애가 있었고, 스스로 이 범죄의 진짜 범인이 되려 하고 있었다. 

"죽여도 괜찮아. 할아버지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

내가 물었다.

"왜 그런 말을 하지?"

"응, 엄마가 아까 전화했어. 할아버지가 나를 싫어해서 무서운 짓을 할지도 모르니까 도망치라고,,, 근데 괜찮아, 죽여도."

"죽인다는 게 뭔지 알아?"

"아니, 근데 괜찮아,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래서 할아버지가 힘들지 않게 된다면,,, 할아버지, 힘들지? 얼굴이 힘들어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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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평>

마지막이 되서야 범인을 알 수 있었던 재밌었던 추리소설. 트라우마와 상처로 점철된 인간은 얼마나 슬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