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고요 '나의 외로움을 궁금해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표지에 대하여
정말 외로운 사람은 외롭다고 말하지 않는다. 타인에게 건너가지 못하고 못 속에 스스로를 유폐시킨다. 고독은 못의 바깥에서, 숨죽여 입을 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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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었던 시들>

P.40 다정 더하기 우울은 위로

상처를 준만큼 상처를 받았다고 하자
그래야 죄책감이 조금은 덜어지니까
수치를 서로 나누어가졌다고 하자
그래야 조금 더 구체적이니까
비겁함을 밀고 밀어서 신념이나
신앙이 될 때까지 뻔뻔해지자
그래야 우리는 어리석을 수 있으니까
그래야 우리는 우리만을 안타까워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야 다시 우리가 사랑할 수 있을 테니까

 

P.41-42 잠기는 돌

물속으로 돌을 던져
파장을 보고 부피를 가늠했다 분주할 것 없는 아침엔 매일 앓느라 바빠 오늘은 쓸데없이 자를 샀다
얼마나 쓸데없는 마음이었는가 재어보려고 함부로 말하는 재단사야
허밍은 어느 절에 꺼내도 슬픈 단조
빈차라는 빨간 불빛을 보면 괜히 붙잡고 싶어진다
괜히 라는 말은 또 얼마나 무력해 우리의 공간이 부피를 가지지 않는다면
사라지지 않고 멀어지기만 할 수 있을까
그럼 언제고 골똘해져
서로의 거리만큼 마름질을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바닥에 그림자를 길게 혹은 짧게 기워내는
뿌리를 드러낸 나무 등허리로 휜 물고기를 품은
숙맥의 손등을 가진 재단사야
네가 그늘을 자르면
목울대에 호수가 일렁인다 고꾸라진 나무의 자세로 선 고요가
다정히 돌을 적신다

 

P.43 당신과 안경

얼굴에 꼭 맞는 당신의 두 눈을 감싸 쥐고
생의 프레임 속으로
우린 명작들을 만들어갈 거야
눈꺼풀은 지평선을 닮아
수도 없이 떠오르고 가라앉는 동안
찰나의 기억으로
은밀한 둘만의 전시회를 열어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가장 완벽한 구도가 되고
같은 소실점으로 포개져 서로의 그림자로 도착할 때까지
당신의 눈 속을 따라 펼쳐진 길을 걸었어
지평선은 눈꺼풀을 닮아
그저 걷기만 하면 된다던 시간은 저물었지만
여전히 당신은 나의 절대적 시점
모든 것이 필연으로 모아지는
점들의 최후에서
기다릴게

 

P.44-45 당신의 배열

여러 가지 배열 중에서
당신은 반듯할수록 마음에 든다고 했어요
나는 반듯할수록 지루한데
그 선이 나에게 뻗은 시선인 줄 모르고 나는 발이 아무렇게나 빠지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앞을 적셔가며 만들어 놓은 돌다리 같은
긴장감 있는 배열이 마음에 든다고 했지요
나는 그걸 낭만이라 믿었고
당신은 그저 외로움이라 했지요
달빛아래 돌을 옮겼을 손과 발의 시림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수줍은 볼 같은 것 아니겠냐고 말하자
당신은 그저 외로움이라 했지요
나는 괜스레 실망하고
당신은 괜스레 슬펐지요
지나고 보니 우리는
강을 건너지 않고
강을 따라 손을 잡고 걸어가면
그 뿐이었는데 말이에요
달빛은 언제나 우리를 앞서 있었는데 말이에요

 

P.48 서로의 수치까지 사랑할 수 있다면

우리는꽃밭에함부로누워
구름의속도로멀어지면서
어지럽게꽃들을망치면
환상은환상이라아름다운것과
한때는한때이므로충분히
사랑스러웠다고서로에게
속삭이는꽃향기에취해서
기꺼이속고속였지

 

P.50-51 you my on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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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대화에는 꽃이 피었다 피어나는 대화는 역시나 어색하지 않고
고개를 들지 않고 위를 올려다보는 소심함이 좋았다 우리가 대화하는 동안 얼굴에는 미소가 피어나고 나는 미소라는 이름이 좋다가도 싫다 아무 곳에나 너그러운 이름은 누구에게도 특별할 수 없어서
여기저기 헤픈 마음을 거리 곳곳에 달아 놓고 다른 사람과의 대화에도 쉽게 끼어드는 이름은 아무래도
좋다가도 싫다 너는 내 전부라는 말과 내 전부는 너라는 말 중에
어떤 것이 더 외롭게 들릴지 고민하다
어떤 걸 선택하더라도 결국엔 두 명인 것 같아 슬펐다 대화는 언젠가 꽃처럼 고갤 숙이고
네 눈빛은 시들어 갈 것이다

 

p.64-65 바람은 물에 자신을 새겨 넣고 그것을 물결이라 우겼다​

내가 당신을 결정한 적이 없엇던 것처럼
빛이 색을 결정한 적은 없었다
그저 우린 모두가 색맹이라서
눈은 빛에 기대고 당신의 눈빛에 내가 기댔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름을 붙여 기꺼이 타인이 되었다
그저 우린 모두가 색맹이라서
빛을 따라 겨우 실오라기 같은 테두리를 얻으려
고갤 쳐들고 허공을 향한 입들, 입들. 바깥을 흠모하는 넝쿨처럼 자꾸만 서로에게 뻗어
​
서로의 실루엣을 어루만지며 사랑에 빠졌듯이
늘 위험한 건 바깥에서 시작된다고
우리는 합창해
함부로 벌린 입으로
경계를 만들고
경계를 가지면 하늘과 바다와 당신과 내가 남는다
이후의 것들은 죄다 무의미 바람은 물에 자신을 새겨 넣고 그것을 물결이라 우겼다
나는 당신을 새겨 넣고 그것을 나라고 우겼다

떠오르는 해와 지는 해를 보며
성대가 없는 기린이 두 세계를 고요히 잇던 경계가 허술한
경계가 흐릿한
새벽에

P.104-105 사월

돌아누운 마음을
염려하지 않기로 했다
그건 새해 같은 맑은 다짐치고는
꽤나 낭만스러워서
아침보단 저녁에 어울렸다
눈을 뜨면서 다짐하는 사람들과는 멀어지기로 했다
자리에 누워 천장을 오래도록
바라보는 사람과 함께하자고
다짐치고는 시시해서 웃었다 사월은 어딘가 근사할 거라는 믿음은 벚꽃 때문에
가능하다
벚꽃은 한때라 평화롭다
​
내가 조금 더 시시해지길 바랐다
내가 조금 더 근사해지길 바랐다 떨어지는 벚꽃을 염려하지 않기로 했다 그건 새해다짐치고는 너무 늦은 것 같아
쉽게 어길 수 있었다

몸 밖으로 터져 나갈 수 있는 꽃들이 부러웠다
나는,
꽃이 아니다

 

<한줄평>

속초 문우당서림에서 전등 천자락에 적혀있던 한문장을 보고 구입했던, 제목부터 마음에 들었던 시집. 가만히있던 감정까지 피어나게 만들어 오롯이 느낄수있게 해주었다. 외로움과 사랑은 한끗차이일까. 아니 교집합이겠지.